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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웅 / 성악가, 지휘자

댈러스에서 살면서 알고 지내던 분이 이곳 캘거리 여름 날씨가 아주 좋다며 꼭 한번 오라면서 초대해 주신 덕에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 와 노래 공부를 했고 지금도 제가 사는 뉴저지에서 성악가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부터 시작한 노래 인생이 어느덧 30여 년이 되어 갑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면서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라며 만족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처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은 서울대 음대 실기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였습니다.  면접관을 앞에 두고 갓 시골에서 상경한 음대 지원생이었지만, 자신있게 부르고 나오는에 느낌에 ‘이 정도면 입학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합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2004년으로 많은 성악가가 그토록 서보기 원하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합창단의 오디션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함께 성악을 공부해 온 아내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합창단 오디션을 봐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미국 유학 온 이후 심한 피로감과 통증을 겪다가 한국에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래를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였습니다. 병원에서 담석이란 진단을 받고 간단한 수술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수술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제때 치료가 안 되고 질병이 누적된 탓에 장기 손상으로 이어져 결국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수술을 마치고 한 쪽 옆구리에 불순물을 제거하는 호스까지 달고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때  ‘이 상태로 더는 노래 부를 수 없겠구나…’며 포기하는 마음마저 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현장에서 지원서를 쓰고 오디션을 봐야 했기에 아내와 함께 거주하던 댈러스를 떠나 뉴욕으로 왔습니다. 그런에, 지원서를 쓰는 아내를 보면서 불현듯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원서를 급히 써내고, 삼손처럼 마지막 힘이라도 주시기를 기도하고 심사위원들 앞에 나섰습니다. 옆구리엔 여전히 호스가 매달린 상태로 노래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때까지 부른 노래 중 그토록 열정적이고 힘차게 노래했던 적이 없을 만큼 잘했다 싶었습니다. 역시… ‘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악가로서 중요한 입지를 쌓는 이런 순간들조차 가볍게 여겨질 만큼 노래하는 저에게 ‘최고의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케냐의 몸바사에서 였습니다.  그곳은 전통적인 이슬람 지역이었고 저는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전혀 종교가 다른 기독교 행사였기 때문에 과연 사람들이 올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무려 7000여 명이나 몰려와 끝이 보이지도 않게 마치 구름떼처럼 몰려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들은 양복 차려입고 차분히 노래하는 성악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노래가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마치자 조용히 경청하던 청중들이 아프리카 특유의 소리를 내며 환호해 주었는데 그 소리가 하도 커 저 멀리 2마일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들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 하늘과 바람 그리고 구름 한 점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National Choral 합창단 지휘자로서 한 해에 수 차례 링컨 센터 공연을 하고 있으며, 뉴저지의 여러 합창단도 지휘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 교회에서 초청받아 찬양도 하고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노래가 더 좋아집니다. 언젠가는 저개발 도상국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취재: 백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