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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희 / 디스타임 기자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 보면 생일은 잊어도 랜딩 날짜는 절대 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2003년 6월 12일 바로 저의 랜딩 날입니다. 회사로부터 열흘 간의 휴가를 내고 따라 나선 남편, 그리고 두 아이들과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지요. 한국은 여름 날씨가 완연했지만, 캘거리는 서늘한 기운이 여전했습니다. 캘거리 공항은 황량한 벌판에 활주로 몇 개만 나 있어 화려한 인천공항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생면부지 우리 가족을 마치 친형제라도 되는 냥 환한 얼굴로 공항까지 마중나와 주셨던 집사님. 그 분이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우리는 캘거리 다운타운을 지나 머물기로 예정되어 있던 홈스테이 가정으로 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자녀 교육이 이민의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오직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뿐 이었지요. 시간이 흘러 2006년 한국에서 혼자 기러기 아빠 생활하던 남편도 캘거리에 합류하면서 우리의 본격적인 이민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다민족 사회인 캘거리에 살았지만 한인 교회에 출석하고 한인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인 친구를 사귀며 한인으로의 삶은 계속 되었습니다. 간간이 아이들 학교에 가 선생님을 만나 상담하고 과외활동이며 캠프를 따라다니며 만나는 캐네디언들과 교제도 하였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라도 만나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반드시 언제 이민 왔는지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자녀들은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묻고는 때론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했었는데 이민 온 후로 우리의 달라진 삶을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질문도 시들해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생활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감당하기도 바빴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단한 삶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 때 한국에서는 모두들 사회의 중심에서 생활했던 주류시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변방의 소수 민족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도 더 이상 새롭지 않았습니다.

언어 장벽,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지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하던 저 조차도 ENMAX 고지서를 받아들고는 이해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요. 학교에서 공문이라도 보내 오면 또, 아이들 숙제도 제대로 봐 줄 수 없었던 무지함을 깨닫던 순간들…나중에 합류한 남편은 20개월의 공백 기간을 보낸 뒤, 한국에서 쌓아왔던 경력들은 다 묻어버리고, 한 회사에 취직해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이민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듯 싶습니다. 물질이든 건강이든 말이지요.

2016년 디스타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이민자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언어 장벽을 극복해가는 과정, 이사회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성공담, 또한, 우리와 다른 교육환경과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가며 겪는 성장통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다독여 주며 때론 박수도 쳐주고 그렇게 우리끼리 정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디스피플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글: 백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