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가을 길 철학 어슬렁거리기(1)

낙엽이 뒹구는 계절에는 철학자로 기웃거리는 것은 어떨까?

 

Remembrance day(캐나다 현충일)를 맞이하는 11월은 온갖 들판은 회색으로 변하고 가슴에는 poppies(퍼피꽃)이 핀다. 먼 나라 한국까지 와서 희생한 캐나다 군인들의 희생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한다.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그렇게 길들여 진 것 뿐이다.

철학적 사고를 한다고 말하면 흔히 변증법적 사고를 하라고 한다. 사고의 지평을 확대시키기 원한다면 변증법적 인식을 갖추라고 한다.

변증법적 사고라 무엇인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선조들의 교훈으로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듯싶다.

덕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 당대에 생기지 않으면 후손에게라도 생긴다. 후손의 입장에서 보면 땡잡았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조상 중 누군가 덕을 베풀었고 그 덕이 돌고 돌아 자신에게 온 것이다. 이처럼 변증법은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의 과정을 거치며 상호연관의 과정 속에서 생성 존재 소멸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즉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이다. 나 홀로 독불장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졸병이 없는데 장군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심화하면,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아니 남자들이 흔히 일수도 있다) 여자가 그렇지! 여자니까? 등의 여성 비하적 표현들도 사실은 남성지배사회에서 만들어진 정형성이라는 것이다. 보봐르의 말을 빌리자면 “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 진 것이다.” 흔히 여자다움이라 표현되는 것들의 상당수가 날 때부터 여성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물적 조건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고 수없이 들어온 필자 또한 캐나다로 이민 와서 보고 느낀 것이 많다. 노동현장을 보면 많은 여성들 스스로가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려고 한다. 특히 중장비를 다루는 여성 노동자를 보고 많이 놀랐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약하다는 고정관념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다움에 대한 변증법적 사고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다움의 가치체계가 생성된 제반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을 거부하고 현상 그 자체만을 갖고 판단하게 되면 인식의 오류를 흔히 범하는데, 그 현상은 지독한 편견과 아집으로 나타난다. 다른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똥고집이라고 한다.

“그럴 수 있지”를 되 뇌이면 부부싸움도 가볍게 끝난다!

“그럴 수 있지!” 이 말은 일견 자기 주장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해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혹시 부부싸움이나 지인과 불편한 일이 생겼다면 “그럴 수 있지!”를 되뇌어 보자. 그 순간 철학자로 변신한다. 그것도 변증법적 인식을 한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진실은 나만의 진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진실도 있는 것이다. 다만 나와 다를 뿐이다. 그 진실을 내가 헤아리지 못할 뿐이지 내가 아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 있지” 하는 순간 상대방의 진실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열린다. 대개 싸움의 원인은 오해와 자기 주장만 하는 고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짬짜면에 숨어 있는 변증법

철학을 기웃거리기로 했으니 한 발 더 나아가자. 변증법의 대부인 헤겔을 만나보자. 그는 변증법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확장시켰다. 우리가 교과서에 배운 헤겔의 정, 반, 합의 3단계를 말한다. 정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 모순이 충돌함으로써 합의 단계로 전개해 가는데 이것이 합의 단계이다. 합의 단계란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짜장을 먹으면 짬뽕이 먹고싶다. 짬뽕을 먹으면 짜장이 아쉽다. 그래서 짬짜면을 먹는다. 이처럼 어는 한가지 만으로서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지만 합침으로써 부족함이 없어 지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짬짜면이 상징하는 바를 단지 현상적인 면으로만 보지 말고 인식의 틀로 보자면 각각이 갖고 있는 반대적 속성을 극복하는 대안을 찾았다는 것이다. 짜장과 짬뽕이 달콤함과 얼큰함을 각각 갖고 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 맛을 알고 있어 한편에서는 상대적인 식감을 탐한다. 즉 각각의 맛의 한계를 자각했다는 것이다. 각각이 갖고 있는 모순으로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일체로서 대안을 창출하는 것이다. 짜장과 짬뽕을 각각 부정함으로써 짜장도 짬뽕도 포기하지 않는 통일체로서 짬짜면의 합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짜장과 짬뽕 그 자체의 존재적 가치는 불변이지만 같이 먹는 순간 식감에서는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통해 새로운 질(단순히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다)로 탄생한다는 헤겔 변증법의 정반합의 3단계이다.

짜장이나 짬뽕 하나 먹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고 짜증내지 말고 우리 삶의 일상이 철학의 연속임을 생각하자! 왜냐하면 그 속에 철학적 삶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사물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변증법적 인식으로 무장되었다면 어디에 써 먹을까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