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가을 길 철학 어슬렁거리기(3) – 그것마저도 허구일 수 있다.

가을 문턱에 가벼운 철학 산책을 하고자 시작 한 글이 의외로 쉽게 걸어지지 않는다.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어 캘거리 사람들이 무진장 좋아(?)하는 눈까지 왔다. 겨울이 왔다고 산책을 멈춘다면 캘거리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나도 옷깃을 여미고라도 좀 더 걸으려 한다.

철학에 대한 깊이를 조금 만 더 깊게 가 보자.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했다는 것이며 인식의 깊이에 따라 학문의 정도를 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주로 자연계 현상에 대한 과학적 관찰과 고찰이 주를 이룬다. 자연법칙을 찾아 내거나 이를 활용하여 인간생활을 이롭게 하는 것을 통틀어 우린 지식이라고 한다.

지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지식은 어떻게 획득 되는 것이며 획득된 지식의 보편성은 또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또한 인류역사의 발전은 다음세대에게 지식의 전달이 가능했기 때문인데 그 지식의 전달은 어떻게 전달하며 수용자는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이는가? 등의 문제가 끝없이 제기 된다. 내가 인식한 것이 실상은 나와 내 주변 몇몇 사람의 생각뿐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마치 보편성을 획득한 모두의 생각이라고 간주한다. 인식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식의 목적은 가장 사실에 가까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지혜를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지각과 감각의 상대성으로 같은 사물로부터 다른 인식을 한다면 진리란 존재하는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무지개 색깔을 우린 편의상 빨주노초파남보로 구분하지만 실제 색깔은 빨주노초파남보에 가까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일 뿐이다. 이를 우린 언어의 한계상 7가지 색깔로 구분하고 명명한 것뿐이다. 따라서 빨강색이 빨강색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인식의 목적은 가장 사실에 가까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그 자체는 아닐 수 있다. 칸트는 인식의 발생과 성립의 근거를 경험에서 찾았는데 경험 또한 상대성을 지닐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만약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현실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면 또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영화 메트릭스와 같이 혹시 나는 컴퓨터가 창조한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말하면 내가 인식하는 것이 현실 속의 실존 물이 아니라면, 이 모두가 꿈이거나 상상에 불과하다면…..

 

통속의 뇌

그 유명한 ‘통속의 뇌’(Brain in a vat)로 나아간다면 우린 대 혼란에 빠진다. 과연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실존 물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통속의 뇌는 인식과 실재에 관한 논쟁에 많이 이용된다. 어떤 과학자가 사람의 뇌를 그 기능이 온전한 상태로 사람의 몸에서 분리하여 전해질로 가득 찬 통속에 넣었다. 그리고 뇌의 뉴런들을 전선들에 연결해서 알파고와 같은 슈퍼컴퓨터에 연결한다. 뇌는 사람의 몸에서 보내는 동일한 전자신호를 컴퓨터로부터 받아 동일한 인식을 한다. 이렇게 되면 몸이 없는 뇌는 컴퓨터가 보낸 신호를 받아들여 자신이 가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 장면이나 사람을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또한 통속에 담긴 뇌는 자신이 전신을 갖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저 통속에 담긴 뇌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관념 속의 상상물인지 구분이 어렵게 된다.

통속의 뇌 실험은 단지 이론적으로 제기 되었을 뿐 실재는 아니었다. 그런데 현실은 실재에 다가 가고 있다.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 그레그와르 쿠르틴 교수는 “원숭이의 뇌에 뇌파를 감지하는 장치를 심은 뒤 뇌파 신호를 끊어진 척수 아래쪽으로 송신해 하반신 마비 원숭이를 걷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언젠가는 그저 통속에 있기만 해도 슈퍼컴퓨터가 전해주는 모든 것을 마치 현실 속에서 하고 있는 것으로 자각할 것 같다. 시뮬레이션은 스스로 현실이 아닌 세상임을 인지하는 반면 통속의 뇌는 실재인 것으로 착각할 것이다.

어느 날 꿈속에 조상님이 나타나셔서 그렇게도 학수고대하던 로또 번호를 던져 주셨고, 그 날은 운 좋게도 그 번호 모두가 생각나서 로또를 구입하였더니 1등에 당첨되었다. 너무 기뻐 소리치다 잠에서 깨어 그것이 꿈이란 걸 알았다면 얼마나 허탈 할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더 나아가 그것마저도 꿈속에서 깬 것이지 실재가 아니라면 그래서 아직 로토를 산 것이 아니라면? 꿈이 아니길 바랬다가 다시 꿈이기를 바래야 하는 것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인식론은 내가 지금 아는 것과 실존하는 것 자체가 실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존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를 다룬다. 물론 실재적인 것은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상관없이 두뇌의 사고 밖에서 엄연히 존재성을 갖고 지속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심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생물체가 과연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지 상상 속의 생물체일 뿐이다. 만약 통속의 뇌가 인식한 것이라면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통속의 뇌는 실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진리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남겼지만 ‘통속의 뇌’라면 이 것마저 흔들리고 만다. 그렇다고 지금 주변의 모든 것이 허구라 생각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기 바란다, 철학을 하자는 것이지 미친0 소리를 듣자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사고의 틀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그 동안 내가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이 혹시 나만의 울타리에 갇힌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자. 그리고 슈퍼컴퓨터를 제도권교육과 관제언론으로 대체하고 통속의 뇌를 자신이라 가정해보자. 허구에 가려진 진실을 보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