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쿠바인들의 가슴에 남은 카스트로! 그의 공과를 평하기는 아직 이르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운명적 만남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는 향년 90세로 25일 밤 타계했다. 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이자 혁명동지인 라울 카스트로는 공식적으로 사망 소식을 26일 전했다.

나는 2016년 3월 쿠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의 모습은 다소 초라했지만 난 그 너머 세상이 궁금했다. 나의 관심은 그들 삶의 철학과 행복지수였다. 특히 돈이 없어서 병원을 가지 못하거나, 교육을 받지 못하는 불평등을 없앤 평등의 나라, 사회주의 국가, 쿠바가 알고 싶었다. 또한 자신의 나라도 아닌 곳에서 목숨 걸고 싸운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원한 혁명전사 체 게바라(본명: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데 라 세르나)를 만나고 싶었다.

 

체게바라

2004년 체 게바라가 모터 싸이클을 타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는 과정을 다룬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53년 박사학위를 받고 체 게바라는 의사가 된다. 그 해 그는 모터싸이클을 타고 볼리비아에서 출발하여 페루, 과텔말라, 파나마, 코스타리카를 거치는 여행을 한다. 이 과정에서 체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삶을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그의 삶을 민중들과 함께 하기로 다짐하고 혁명가의 삶을 산다. 영화 속 민중들의 삶이 잔잔히 떠오른다. 1955년 체 게바라는 마침 멕시코로 망명한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 쿠바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의 운명적 만남이며 혁명적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쿠바의 한 농촌에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카톨릭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변호사가 되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53년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고자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재판에서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라고 그 유명한 자기 변론 발언을 했다. 2년 후 피델 카스트로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하여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되었다.

 

12명의 전사가 불씨가 되어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다.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333척의 왜선과 싸워 이긴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쿠바에는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그리고 그의 혁명동지들이 있었다.

1956년 70여명의 무장조직을 조직한 카스트로 부대는 쿠바 해안에 상륙하다 적발되어 대부분이 사살당하고 12명의 전사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 12명의 전사가 불씨가 되어 쿠바를 혁명의 불꽃으로 만든 것이다. 혁명을 성공 하기까지는 이 전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도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이들을 지원한 쿠바 민중들의 헌신적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쿠바 민중들은 바티스타 정권의 부패로 등을 돌렸다. 1959년 마침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 버티던 부패한 독재정권을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중의 부대와 함께 싸워 무너뜨린다. 그리고 새로이 수립된 독립정부는 반미를 내세우고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부패한 정권과 그와 결탁한 부패세력으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가난한 민중들에게 분배하여 민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피델 카스트로는 국적은 다르지만 쿠바 혁명성공에서 핵심 공로자의 한 명인 체 게바라를 국가 중요 요직에 임명하고 쿠바 국민은 이를 전폭적으로 받아 들인다. 이때 카스트로의 나이 33세, 체 게바라의 나이 31세였다. 체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정권의 기초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 소련과의 갈등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체 게바라는 현실에 안주하는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다짐한 그 약속을 지키고자 다시 게릴라로 돌아간다.

1966년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난한 라틴아메리카로 확산시키고자 볼리비아 혁명군에 가담하여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싸운다. 1967년 체 게바라는 전투 중 미군에 생포된다. 쿠바 혁명 과정에서 눈에 가시로 여겼던 미국은 체포된 다음 날 재판도 없이 체 게바라를 총살하고 아무도 모르게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30년 후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묘를 찾아내 쿠바 산타클라라시에 기념관을 세우고 시신을 옮겨 왔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공통점은 출신나라도, 직업도, 권력욕도 아닌 핍박 받는 민중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이념이었다. 그 하나가 그들을 평생동지로 만든 것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변하여 서로를 물어 뜯는 오늘 날의 정치가들이 본받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면 말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총리를 재임했고 1976년부터 국가 평의회 의장을 역임하다 2008년 혁명동지이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물러났다.

 

서방국가에 문을 열고 달러 유통을 허용하며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애쓰는 쿠바

1991년 소련붕괴에 이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쿠바에도 고통을 안겨주었다. 1961년 미국의 외교관계 단절과 1962년 대 쿠바 금수조치 단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쿠바는 1991년 소련 붕괴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93년 부분적으로 달러의 유통을 허용하면서 개방정책을 도입하였지만 경제회복은 더디고 일자리는 많지 않아 2016년 현재 젊은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쿠바를 여행하는 중에 우연히 만난 현지인의 초청을 받고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70년대 초 낡은 버스를 타고 거의 1시간 거리를 가야 했다. 아내는 판사출신이었으나 지금은 리조트에서 법률자문역으로 일하고 있었고 남편은 엔지니어로 일하며 관광 가이드 일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둘 다 대학을 졸업한 우수인재였지만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쿠바에서는 판사도 특권층이 아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 부부가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반갑고 친해져 클럽에 가서 함께 춤을 추며 밴드 공연을 보는 기회도 가졌다. 외국 관광객에게는 버스금액도 클럽입장료도 비쌌지만 쿠바인들에는 1/10도 안 되는 매우 저렴한 금액이었다.

내가 본 쿠바는 적어도 북한과 같이 가난에 허덕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생필품 값은 매우 비쌌지만 국민들의 모습은 70년대 우리 농촌의 인정 많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차별의 부자나라는 아니고 평등한 가난의 나라였지만 이제 막 경제적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나의 바램은 조금 천천히 발전하더라도 지금의 쿠바 국민의 따뜻한 정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돈만 벌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성공하면 장땡이라는 일제 강점기의 병폐로, 어려운 이웃을 서로 보살피던 우리민족의 고유정신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카스트로는 전국민을 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추진하여 복지제도 측면에서는 미국보다도 우위에 있다. 돈이 없어 병원을 못 가 죽는 사람은 없다. 쿠바는 아직도 낡은 사회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2016년 미국의 양키스 야구팀이 쿠바에 가서 경기를 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투루도 캐나다 수상도 방문하여 국교를 돈독히 하고 있다. 서방에 문을 연 쿠바는 이제 깨어나고 있다.

쿠바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대하며, 발전의 성과물이 1%에 귀속되는 빠른 성장보다는 99%가 함께 나눠 갖는 느린 성장을 기대한다. 개인적 욕심이 공동체 욕심에게 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