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향기

박춘재와 발탈

임방울, 임방울, 이동백, 이화중선, 정정렬, 김창환…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명창들이며 판소리나 민요가 유행가였던 시절, 이들은 지금의 아이돌에 견줄만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 시절, 문화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소리로 사랑 받던 명창이 있다. 바로 ‘박춘재’…

 

박춘재는 191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명창으로 1883년경에 태어났으며 1950년에 작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무별감(歌舞別監)’을 지내기도 했다. ‘가무별감’이란 임금의 곁에서 음악을 선보여서 임금을 위로하는 직책을 뜻한다. 박춘재는 장대장타령, 병신타령과 같은 재담소리와 굿을 무대화하기도 했고 많은 음반을 발표했으며 특히 제자들을 많이 육성해서 경서도 소리의 맥을 이었다.

 

박춘재 명창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그와 관련된 실화에서 생겨난 속담도 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유성기가 들어 왔을 때의 일이다. 고종 황제는 어전에 원통식 녹음기를 설치하게 했고, 박춘재를 불러 나팔통에 입을 대고 소리를 하게 한다. 그리고 그 후 유성기에서 녹음된 박춘재의 소리가 다시 흘러나오자 고종은 깜짝 놀라며  “춘재야, 네 수명이 십 년은 감했겠구나”라고 했다 한다.  ‘십년 감수’라는 말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박춘재는 미국 시카고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895년 6월에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해서 한국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빅터 레코드사에서 녹음을 했으며 1906년에는 빅터 레코드사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경기잡가인 적벽가를 취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춘재는 ‘재담소리’로 유명한데 ‘재담소리’는 익살과 재치가 담긴 재미있는 노래를 뜻하며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우스갯소리를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재담을 좋아해서 재담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고려 문종 때 편찬된 ‘수이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재담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그 역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수많은 재담가들은 이름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는 반면, 박춘재만은 생생한 목소리가 아직 기억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박춘재가 재담을 질적으로 한 단계 상승시켰기 때문이며 박춘재는 ‘근대 코미디’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박춘재는 광무대와 단성사 같은 실내극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재담 공연을 했던 일종의 연애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이는 박춘재를 ‘최초의 연예인’, 혹은 근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코미디언’이라 말하기도 한다.

 

박춘재의 작품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 ‘발탈’이었다고 한다.  발탈은 탈을 발바닥에 씌워서 노는 탈놀이로 발바닥에 탈을 씌우고 발목을 전후좌우로 움직이고, 제자리에서 떨고, 순간적으로 발을 끄덕거려서 웃거나 화가 난 표정 등을 연출하는 것인데, 연희자는 누워서 발목만 무대 밖으로 내놓고, 인형을 노끈으로 연결해서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을 한다.

생각만 해도 참으로 흥미 있고 재미난 모습이다. 발탈은… 하지만 나는 아직 발탈을 본 적이 없다. 발탈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 79호로 지정이 돼 있지만 보유자였던 이동안 명인(박춘재의 제자)은 작고 하셨고, 그 뒤를 누가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전통의 재창조’가 시도돼야 하지 않을까? 재담이 있어서 재미를 줄 수 있고 발에 탈을 씌우고 노는 독특한 공연양식인 ‘발탈’이야말로 재조명 돼야 하는 우리의 공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근희(국악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