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향기

우리악기 이야기 – 김영랑 편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시 속의 우리 악기 – 김영랑 편

 

계절이 깊어지니 잠자고 있는 감수성이 살아나기라도 하는 듯 문득, 시집을 꺼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시집을 차분히 손에 들고 시어들을  되새기며 한 나절을 보내본 적이 언제였을까? 오래된 시집들을 하나 둘 꺼내 들고 있자니 문득, 시 한 수 읽을 여유도 없이 지내는 나의 일상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이런 저런 시집을 둘러보다 ‘김․영․랑’이라는 이름과 함께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라는 구절이 떠올라 시집을 펼쳐본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머리 잦아지다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이도 숨을 고쳐 쉴 밖에

 

<북>이라는 시를 다시 읽어 보니 김영랑 시인이 판소리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헛 때리면 만갑이 즉, 송만갑 명창도 숨을 고쳐 쉴 수밖에 없다는 말은 시인이  “일고수 이명창”(소리판에서는 첫 째 고수가 중요하고 그 다음이 명창이라는 의미)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다”는 구절에도 큰 공감을 하게 된다. 명창과 명고수의 소리와 장단이 딱 들어맞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면 얼마나 신이 날까? 절로 인생의 추임새가 나올 것만 같다, 김영랑의 <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 인디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치

 

전라남도 강진 출신인 김영랑은 남도창을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판소리나 민요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직접 공부를 했던 적도 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 예인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작품이 바로 이 시가 아닌가 싶다. 그는 또한 우리악기를 소재로 한 시도 남겼는데 그 중 “거문고”라는 시는 읽을수록 그 뜻을 새기게 된다

 

검은 벽에 기대선 채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은 영영 울지 못한다.

 

여기서 ‘기린’은 거문고를 뜻하고, 해가 스무 번이나 바뀌었지만 소리를  잃고 벽에 서 있는 거문고는 나라를 잃어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시인 자신일 것이며, 또한 그 시대의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소리를 마음껏 내지도 못한 채 벽에 기대 선 거문고에는  암울한 상황에서 자유를 빼앗긴 상태로 살아가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 가슴을 퉁 하고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어라

바깥은 거친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이 쏘다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곳 몸둘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은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던 시인 김영랑. 그의 기린이 맘 놓고 울 수  있는 날은 바로 이리떼와 잔나비떼가 사라지고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거문고의 음색처럼 당당히 울릴 수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김영랑 시인은 3․1 운동 당시 강진에서 의거를 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매 단풍들것네”….라는 정감어린 표현을 남긴 김영랑시인은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이라는 것을 증명한 시인이다. 그리고 그는 ‘춘향’이라는 시도 썼는데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 국창으로 불리던 임방울의 ‘쑥대머리’, 즉 춘향이가 옥중에 갇혀 부르던 판소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임방울이 쑥대머리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줬다면 김영랑은 이 시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의 지조를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김영랑 시인의 시를 읽으며 시와 문학, 그리고 문화와 예술에 담겨  있어야 할 정신과 혼에 대해 생각 해 본다. 우리들 안에는 지금 무엇이 담겨 있을까?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 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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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생가)

 

박근희 (국악 칼럼리스트)

2008년 10월 월간 KBS 오케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