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프랑스 민주주의 성장과 마리 앙투아네트

1997년 나의 딸이 아마 6살 때이다. 당시에는 동네에 비디오 대여점이 성업 중이었다. 골목마다 대여점이 들어섰을 정도였다. 그때 우린 베르사유 장미라는 비디오에 푹 빠졌다. 시작은 딸이 보는 것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느새 아내와 나는 다음 편을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40여 편을 보는 내내 어린 딸보다 성인인 우리가 더 재미있게 보았다. 작품은 일본인 이케다 리요코의 원작을 데시키 오사무 감독이 만들었다. 내용은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트아네트와 스웨덴의 귀족 페르젠 사이의 사랑과, 마리 앙트아네트의 호위를 맡은 오스칼과 앙드레와의 사랑이 줄거리다. 딸로 태어나 아들로 키워지고 남성으로 행사하다 앙드레의 지극한 사랑에 여성으로 답하게 되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다. 비록 어린이 만화영화지만, 내가 더 재미있어 딸과 함께 OST를 따라 부르곤 하였다.

 

프랑스 혁명

1789년 5월 5일 프랑스 왕정은 재정 파탄을 해결하고자 삼부회의를 베르사유 궁정에서 개최한다. 3%의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97%의 시민이 참여하는 회의였다. 구성은 양측 대표단 300 대 300으로 600명으로 구성되었다. 회의는 양측의 첨예한 대립으로 끝났다. 그해 6월 20일 시민 대표들은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로운 국민의회를 만듦으로써 혁명의 서곡을 울린다. 절대왕정에 반기를 든 최초의 사건이다. 그 이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시민들이 무장하게 되고, 1789년 8월 26일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인권선언을 가결한다. 인간의 자유, 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과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등 봉건 영주와 귀족의 특권 폐지를 내세웠다.

1789년 10월 혁명의 불을 댕긴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던 국왕을 파리로 귀환시킨 사건이다. 그리고 이 시위대에는 파리 하층 시민 부녀자들 특히, 시장에서 생선을 팔던 여인들이 선봉에 섰다. 380년 전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 내고 화형 당해 죽은 ‘잔 다르크’도 19세의 여성이었다. 1791년 국왕의 파리 탈출 시도와 바렌에서의 체포로 파리로 송환되는 사건, 1793년 단두대에서 국왕의 처형과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1794년 공포정치의 상징인 로베스피에르의 처형과 1799년 군사적 독재를 수립한 나폴레옹의 “혁명은 끝났다”는 말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프랑스 대혁명에 얽힌 이야기

 

무능하고 소심한 루이 16세의 현실 인식

굶주림에 지친 시민들이 혁명의 깃발을 들고 일어선 당시 루이 16세는 사냥에서 돌아와 일기에 ‘오늘은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썼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에게 ‘폭동’이냐고 물어 하인은 ‘혁명’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루이 15세가 전투에서 패하고 천연두로 사망하여 루이 16세는 왕이 되었다. 위기에 놓인 왕국을 다스리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왕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국의 안전을 위해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수립하고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 아니면 빵을 달라”는 시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실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작인의 밭을 마차를 몰아 망치는 일이 당시 프랑스 왕실의 전통이었으나 이를 거부한 유일한 왕비였다고 한다. 아마 당시 프랑스 왕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낳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단두대에 오르기 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데리러 올 마차가 왕실마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온 것은 지붕도 없는 사형수 호송 마차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시내를 거쳐 단두대로 향했다고 한다. 세 번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 스타일이다. 당시 이국에서 온 왕비의 패션은 귀족사회에서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 스타일에 집착하여 1m가 넘는 올림머리를 하였고, 이를 치장하기 위해 몇 시간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실제 프랑스 왕실의 재정 파탄은 선대의 향락과 미국독립전쟁 지원이 가장 결정적 원인이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낭비가 왕실재정을 더 어렵게 한 것은 사실이다. ‘적자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아마 파티를 좋아하고 독특한 패션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한 탓일 것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장 잘 표현한 일화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일 것이다.

출세욕에 눈이 멀었던 귀족 갑부 로앙 추기경은 당시 왕실의 여자 절반과 잠자리를 했을 만큼 호감형 제비였다. 이에 우쭐한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방 팜플릿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는데 이를 마리 앙투아네트가 알게 되어 후에 로앙이 관직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몰락한 귀족 타모르 백작 부인은 이를 알고 로앙 추기경에 접근하여 자신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하다고 하며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던 중 한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져와 허영심을 부추겼으나, 이미 바닥난 왕실재정을 알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사 주겠다는 것도 거부하였다. 그런데 타모르 백작부인이 로앙에게 접근하여 왕비가 다이아몬드를 갖고 싶어 하니 이를 구매하여 선물한다면 화해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구매비를 받아내었고, 다이아몬드 상인에는 왕비가 마음을 바꿨다며 돈은 나중에 주기로 하고 다이아몬드를 받은 후 잠적한다.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모든 누명을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집어쓴다. 문제는 시민들에게 이러한 사기극이 먹혀들 만큼 왕비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사건을 통해 알게 된 관직 매매의 폐습, 왕실의 사치, 귀족들의 부도덕한 행위였다. 특히 왕과 함께 파리 탈출을 시도한 왕비의 행위는 시민들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한 결정적인 배신행위였다. 하나의 진실은 왜곡되었지만, 그 동안 아홉 개의 불신과 거짓을 행했다면 시민들은 그 한 가지의 진실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자유, 평등, 박애를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권위를 믿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시험해보라”는 계몽사상으로 깨우친 시민 정신의 승리다. 그 승리의 길에 일부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단두대에 피를 뿌렸지만, 그 몇 배의 시민들은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렇게 성장한 것이 오늘날의 프랑스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