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함께 가는 길이 행복하다, 보수와 진보는 동반자

살아가면서 ‘그 사람 믿을만하다’ 그 사람 괜찮아! 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 내게 떡을 준 것도 아니지만, 기분이 좋다. 가끔 욕심의 유혹에 넘어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내 잇속만 챙길 때도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기에 나를 좋게 말해주면 찔리지만, 가슴에는 떨리는 벅참이 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한발 늦게 가고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기다려줄 때,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이 물건을 흘렸을 때 대신 집어줄 때, 마켓에서 잔뜩 라면을 사 들고 계산할 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외국인에게 라면 하나를 건네주며 웃어줄 때, 코스트코 회원권이 없어서 매번 부탁드려도 기꺼이 같이 가주고 차까지 태워주시는 분의 미소를 볼 때, 차가 고장 나서 갓길에 세우자 뒤쫓아 오던 차량이 지나쳐가다 멈춰서 내게 뛰어와 도와주려고 할 때 행복하다. 이 모든 행동에 내가 손해 본 것도 없고, 별로 시간 낭비도 없었는데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행복함을 느낀다.

이런 행복을 나누고 살자는 것에서 우리 삶은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우린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진보를 사랑한 보수, 보수를 사랑한 진보

사회의 역동적 변화는 때론 갈등이 가져오고, 때론 협력이 불러온다. 인간 역사의 단계에서 보수와 진보만큼 절친이면서 앙숙인 관계가 있을까?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논의가 뜨겁다. 특히 선거철을 맞이할 때면 보수, 진보의 본디 의미는 퇴색하고 짬뽕만이 메뉴에 오른다. 그래서 중도보수, 합리적 보수, 진보적 보수, 실용적 진보 등 덧붙이기가 기승을 부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수, 진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더 솔직히 표현하면 유권자를 의식해서다. 보수,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물론 중간지대의 유권자까지 포용하기 위해서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정책은 진보적이고 어떤 정책은 보수적으로 혼합되어 있다. 물론 성향으로 지향하는 바는 구분되기는 하지만.

최근 트럼프의 정책 노선의 변화(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퇴조 현상)에서 보듯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정책은 유기적 생명체이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는 끊임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 사랑이 짝사랑에 머물고 그 짝사랑이 길어지면 미움이 발생한다. 그리고 헤어진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줄 때 사랑은 싹트거나 아니면 적어도 외면하지는 않는다. 우리 역사는 이렇게 발전했다. 현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미래의 가치를 존중할 때 우리 역사는 진보했다. 역사의 진보란 우리의 삶이 나아졌음을 말한다.

 

보수주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진보와의 사랑 속에 태어났다.

먼 옛날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혁명을 거치며 박제가 된다. 이전까지의 혁명 개념은 절대군주를 인정하며 시민이 더 나은 삶을 요구할 때 쓰였다고 한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 요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시민들은 더는 절대군주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곧 국가가 될 수 있다. 군주가 필요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변화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구체제의 낡은 관습을 폐지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혁명의 개념이 자리 잡은 것이다.

혁명과두정부로 등장한 자코뱅 당의 로베스피에르는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기존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론은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지도 못하고 피의 향연만이 있었다. 그 자신도 단두대를 피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며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보수주의의 출현

1790년 영국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프랑스혁명 및 런던 사회단체의 활동에 대한 고찰>에서 보수주의를 주장한다. 전통적 생활규범이나 역사와 호흡을 같이하며 형성되어 온 전통적 가치가 헌법에 숨은 지혜를 전해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헌법적 가치를 준수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의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구제도를 낡은 관습으로 치부하며 부정하는 순간, 우린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을 이끌어갈 나침반을 잃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현실사회를 유지하며 우리의 일상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자는 것이 보수주의다. 따라서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주의와는 구분해야 한다. 다만 기득권 세력이 수구꼴통이라는 본질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보수세력이라는 외피를 둘러씀으로써 보수주의가 욕보고 있다.

 

보수와 진보는 속도의 차이가 아니다.

흔히 우리는 차 포 다 떼고 보수주의는 점진적인 개혁을, 진보주의는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 하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다. 인간의 본성을 불안정하며 신뢰할 수 없으므로 오늘을 있게 한 과거 역사의 정통성에 근거해서 현실사회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견해가 보수주의에 가깝고,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어 역사는 발전해 왔다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를 추구해 나가자는 견해가 진보주의에 가깝다. 부연하면 진보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가짐을 건강히 다스리는 것 또한 진보주의다. 내 주변의 작은 어려움을 돕고 나를 변화, 발전시켜 나가는 자가 진정한 진보주의자다.

이와 같은 의미를 왜곡해서 기득권 세력은 보수주의를 수구 세력화 하거나 진보세력을 사회혼란의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 같은 이분법적 재단은 보수와 진보의 상대적 긍정성으로 발전해온 역사적 사실을 굴절시켜 자신들의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 세력의 행태일 뿐이다.

 

시야를 넓히자! 보수면 어떻고 진보면 뭐 대수냐?

보수와 진보는 개인 간의 경쟁이 아니다. 사회발전을 위한 철학이다. 그 철학을 기반으로 정책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상대를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1등 하기 경쟁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를 이루기까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간이 더 나은 존재로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왔다. 이것이 역사의 진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개선의 노력이 현실에 방점을 찍으면 보수에 가깝고 미래에 방점을 찍으면 진보에 가깝다. 이론의 틀 속에 박힌 보수, 진보개념에서 헤매지 말고 현실에서 이해하자. 이미 모든 나라에서 진보와 보수의 의미는 퇴색하여 나라의 특색과 문화에 맞추어 실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기득권 세력들은 아주 잘 활용하여 그 효능을 만끽하고 있다.

우린 단체 버스를 타고 있다. 먼저 탔다(진보)고 버스기사 빨리 가자 재촉하지 말고 조금 늦게 오는 사람(보수)이 있으면 같이 타고 가자고 해야 한다. 가다가 길이 혼잡하면 조금 기다리고(보수주의) 뻥 뚫리면 조금 빨리 가기(진보주의)도 하면 된다. 모두 가서 할 일이 많다. 그러니 혼자 가지 말고 함께 가자. 혼자 가면 혼자 할 일만 아주 많다. 함께 가면 그만큼 내 어깨도 가벼워지고 즐거운 길이 된다. 이렇게 함께 사는 길을 보수와 진보가 어깨동무하고 때론 밀어주고 끌어주면 훨씬 더 풍요롭고 여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