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문선의 실타래

잊고 살았던 많은 날!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오월은 아직도 산 자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다.

며칠 전 우연히 5.18 기념식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그동안 틀에 박힌 기념식이라 별 관심이 없었다. 2017년 기념식에선 한 여성이 나와서 글을 읽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완도에 살고 계셨다. 엄마는 만삭이 되어 광주 병원에 먼저 입원했고, 자신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에 들어왔다가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태어나면서 아빠를 잃은 아가였다. 얼마나 설움에 겨웠으면 글 한 자 한 자를 읽을 때마다 울음이 묻어 나왔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빠와 아저씨들이 흘린 피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선사했다는 것을 알았다며 하늘에 계신 아빠를 불렀다. 그리고 발걸음을 옳기는 여성을 말없이 일어선 문재인 대통령은 품어주었다. 어미 잃은 작은 새를 안아주듯이 말이다. 공식적인 사망자 집계가 229명이고, 부상자는 3천여 명에 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진상을 밝히라는 부산제일교회 임기윤목사는 보안사에 연행된 며칠 뒤 주검으로 돌아왔다. 또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우리 앞에 진실은 바로 섰다. 그런데 아직도 우린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만 누가 어떻게 모의하고 지시했는지 실체적 진실을 모르고 있다. 진상규명은 수백 명의 목숨과 수천 명의 상처를 앗아가고도 아직도 드러나고 있지 않다. 산 자의 부끄러움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그는 내게 특별하다.

내게 강기훈이란 소중한 동료가 있었다. 내 삶의 인생에서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드는 동료다. 1988년 내 기억에 그는 가난한 집안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하고 소심한 동료였다. 그런데도 전국민족민주연합(이하 전민련)에서 열정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소중한 동료였다. 그런 그에게 국가는 유서 대필이란 사건을 억지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1991년 국가권력은 목격자는 물론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뇌물 감정으로 구속된 국과수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허위 필적감정만을 갖고 강기훈을 감옥으로 보냈다. 강기훈은 3년을 꼬박 채우고 만기 출소했다. 이유는 이렇다. 전두환의 배턴을 이어받은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시위와 분신이 이어졌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권은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여 자살을 강요한다며 민주세력을 어둠의 세력이라고 몰아붙였다. 민주화의 불길을 잡는 도구로 유서대필 사건을 이용한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이 불의의 국가권력에 목숨을 걸고 싸울 때 한편에서는 권력을 잡고자 동료 군인과 국민을 제물로 삼은 독재정권에 빌붙어 자신의 지위를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한 머리가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고, 일선에서 사건을 총지휘한 부장검사가 강신욱이다. 강신욱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리고 지금은 감옥에 있다.

 

억울함이 암으로 자라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가서야 국가는 잘못을 인정했다.

강기훈은 14년이 지나고, 자신의 몸은 엉망이 된 간암 말기가 되어서야 무죄선고를 받는다.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재심에서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이다. 국과수는 스스로 지난날 감정이 잘못된 감정이라고 고백했다. 2008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서 암이 자라고 있음을 몰랐다. 가정을 위해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모든 것을 잊고 살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아빠가 유서 대신 써 준거 맞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다시 돌아가야 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 잘못이 시작된 원점으로 돌아가서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가 14년을 고통 받는 동안 그래서 그 고통이 안에서 곪고 곪아 암으로 성장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의 아픔을 나누지 못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뒤늦은 변명이지만 나는 사실 그때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설마 그래도 국가가… 누가 보아도 명확히 다른 글씨체를 여기저기 구석에서 억지로 글씨도 아닌 같은 모양의 초성, 중성, 종성을 찾아내어 “이것은 동일인의 필적이다” “유서 대필이 맞다”라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런 억지가 검찰과 법원에서 한통속이 되어 긴밀하게 짜고 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셀프 승진, 셀프 미화 전두환은 아직도 거짓 진화 중

최근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발포 명령을 한 적이 없다고 썼다. 서울에 있는 자신이 어찌 광주에 있는 병사들에게 일일이 발포 명령을 할 수 있겠냐고 항변했다. 이런 변명도 웃기지만 당시 전두환이 소집한 회의에서 강력한 자위권을 발동하라고 전두환 자신이 강조한 기록이 발견되어 거짓임이 바로 밝혀졌다. 자신의 군사반란을 구국에 찬 고뇌의 결단이라고 미화하는 그에게 참회를 바라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1980년 5월 광주를 무참히 짓밟은 전두환은 권좌를 차지하고자 하나씩 순서를 밟는다. 그리고 8월 6일 23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 기도회’를 연다. “구석구석 악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요지의 기도회였다고 한다. 이 기도회를 시점으로 전두환은 그날 자신을 소장에서 대장으로 셀프 진급시키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며, 21일 전 군지휘관 회의에서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한다.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서 단 두 분의 목사(신현균, 지원상)는 참회 성명을 발표한다.

 

진실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진실을 가리는 가짜 뉴스를 만들고 퍼트리는 것은 결국은 자신과 후손의 미래를 망친다는 사실은 명심해야 한다.

1980년 5월의 참상도 당시 언론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보도했다. 부끄럽게도 진실이 밝혀진 것은 당시 독일 공영방송의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가 계엄군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광주에 진입하여 취재한 영상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 대가로 목뼈와 척추가 경찰에 맞아서 부러지는 일을 겪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2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였다. 서울 전역의 대학생들이 중심에 섰고 시민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시위지도부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군부에 빌미를 줄 수 있다며 시위를 중단하고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기다렸다는 듯이 신군부는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광주에서 무참히 시위진압을 시작한다. 그렇게 불의와 거짓은 시작된 것이다.

진실을 감추었고, 감출 수 있었던 5월 광주! 그러나 지금은 감출 수 없기에 왜곡하고 있다. 전두환은 셀프 가짜 뉴스를 만들어 회고록에 실었다. 또 누군가는 그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 진실은 진실이다. 특히 역사적 사실은 누구에게는 진실이고 누구에게는 거짓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상규명을 원한다. 진상규명은 잘못이 없는, 억울함이 없는 사실을 밝히고자 함이다. 박근혜가 억울하다면 국정농단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진실은 감추고 억울하다고만 하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음이다.

부끄러움의 5월 하늘이, 맑고 청청하게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그때 나의 안일함과 설마 국가권력이 국민을 권력의 희생양으로 삼기야 하겠는가? 하는 ‘설마’를 강기훈은 혼자 고통받으며 얼마나 외로워했을까? 이 모든 미안함에 친구 강기훈이 병마를 이기고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5월은 가슴이 저린 오월이다. 2017년 5월을 통해서 나만이 아니라 오월이 가슴 아픈 국민의 마음도 다독거려 줄 수 있기를 바란다.